(8세) 초등학교 입학 즈음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기에 다닌 유일한 학원으로, 아파트 주민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진행했을 때, 학원에서 가장 피아노 연주를 잘 하는 누나와 함께 2인 연주를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초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다니던 학원에서 가장 잘 치는 아이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가면서 관뒀다.
(9세) 초등학교 2학년 때, 반에서 한 명씩 꿈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는 것’ 이라고 대답했었다.
(11세)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경험했다. 당시 고성능의 컴퓨터로 기억하고, 그 때 친구집에서 했던 게임은 파랜드택틱스2 와 삼국지공명전 이었다.
(12세) 초등학교 5학년 때 음악 수업은 1년동안 담임 선생님 대신 내가 오르간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음악 수업 때 배우게 된 노래를 반주할 때, 음정이 이상하여 생각되어 오르간 앞에 앉아 아무런 연주를 하지 않았다. 무반주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학원에 가서 음악 교과서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연습했고, 그 후 더이상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12세) 초등학교 5학년 마지막 즈음, 연극 수업을 하게 되었다. 주제는 베토벤 `월광`이라는 음악에 대한 연극이었고, 8개의 조가 각자 연극을 준비하였다. 우리조의 발표가 끝났을 때,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평가했다. “이 조의 연극은 피아노 연주가 최고네요!”. 생각해보니, 연극 연습보다 월광 곡 연주 연습하는 것이 더 좋았던 것 같다.
(12세) 사촌들이 거의 1살씩 터울로 예닐곱쯤 되는데, 그 중 막내 동생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은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13세) 동전을 모으기 위한 빨간 돼지저금통은 우리 집에도 있었고, 꽤 큰 편이었다. 나는 가끔 거기에 있는 동전을 빼내어 오락실에 가곤 했는데, 6학년때 이를 부모님께 들키고 말았다. 그날 저녁은 아버지에게 내 인생 중 가장 심하게 혼났던 저녁이었다.
(13세) 6학년 때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 도스에서 돌아가는 게임을 많이 했었다. 특이했던 것은 집에서도 타자연습을 꽤 하는 편이었는데, 초등학생 때 한글 타자 속도가 400이 넘었다.
(14세) 중학교를 9지망으로 지명한 학교에 되었다. 집에서 너무 멀었고, 결국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모두 이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 사귀게 된 친구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고, 현재도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다.
(14세) 중1때 반 친구의 권유로 학교 바로 앞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 동안 이 학원만 다녔고, 노란버스로 등원을 했었는데 집과 거리가 가장 멀었던지라 학원 등원 시간만 1시간정도 걸렸던 거 같다. 차에서는 주로 책을 많이 봤었다. 가장 많이 본 책은 이문열삼국지, 판타지소설.
(15세) 게임을 하다보면 난이도가 높은 게임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든 엔딩을 보고싶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이브파일을 편집해보면서 간접적으로 에디팅을 시작했던 거 같다. HEXA, ULTRA EDIT 같은 프로그램을 처음 사용해 봤고, 0xFF 같은 표현이 익숙해졌다.
(16세) 중학교 시절 내내 나는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다. 당시에는 급식과 도시락이 모두 혼재되어 있었는데, 급식 퀄리티가 좋지 않아 맛있는 반찬을 가진 친구들은 표적(?)이 되곤 했다. 중3때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던 나를 포함한 3명이 밥을 함께 먹었었는데, 이 3명의 반찬 퀄리티가 학급 내 최고였다. 맛있는 반찬은 가급적 늦게, 하이에나(?)가 없을 때 오픈해서 먹곤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왕 다툼이 발생하곤 했다. 이 시절 이 후, 식사할 때 반찬을 소비하는 순서나 습관이 바뀌었다.
(16세)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의 권유로 판타지동호회에 들게 되었다. 당시 장르문학이 굉장히 인기있었고, 관련 책들은 거의 다 읽었었던 거 같다.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세) 고등학교 입학 후 첫 모의고사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모의고사 직후,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께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했고, 이를위해 필요한 서적을 구매하고 음악 선생님을 찾아가 점심시간에 따로 작곡 공부를 배웠다. 하지만 그리 오래 하지는 못했고, 고등학교 생활동안 수능 준비를 하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7세)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모님이 mp3를 선물해 줬다. 국내 노래보다는 해외 노래를 많이 선호했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내 mp3는 인기가 별로 많지 않아 친구들이 빌려달라고 많이 하지 않았다.
(18세) 고등학교 2학년 때, 코스튬플레이를 등떠밀려 하게 되었다. 창작 캐릭터를 준비 했었는데, 당시 행사장에서 많은 인기를 받았다. (2시간 정도 사진촬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회 참여를 제안 받았고, 거기서 금상을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덕후(?)같은 면보를 약간 깔보는(?) 것이 있었는데, 이 후로는 더이상 그런 일이 없어졌다.
(18세) 위 내용과 관련하여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다 보니, 처음으로 단기 일자리를 통해 돈을 벌어 무언가를 실행하는데 소비해보는 경험을 하였다. 특별히 정해진 용돈은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받아서 썼었기 때문이다.
(19세) 고등학교 3학년 때, 라그나로크 온라인 게임을 처음 접했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이 혁신적이었고, 그래픽이나 게임 퀄리티 등이 내취향이어서, 좀 더 좋은 성능의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었다. 당시 부모님은 안된다고 했고, 단식투쟁이나 무응답 등 온갖 개김(?)을 시전했다. 1주일 정도 지켜보던 이모가 대신 사줬었다.
(19세)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지원을 하는데 가급적 안정적으로 선택하여 세 군대 지원을 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합격이 되었는데, 어떤 학교를 선택할지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가 전자계산학과였다.
(20세) 입학 이 후 추가 장학생 선정이 되었다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80만원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학년 1학기 생활비를 이것으로 썼다.(부모님은 모르신다.) 대학교 입학금 까지는 집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이 후부터 등록금은 스스로 벌어서 다녀야 했다.
(20세) 신입 OT때 용감하게 소주1병을 원샷했다. 그 이후로 전혀 기억이 안났는데, 필름이 끊어진다는 것을 처음 경험해봤다.
(20세) 입학 후 소모임, 스터디 등에 대한 수요 조사를 했는데, 당시 친했던 선배가 소모임 중 하나 회장이었다. 가입을 권유받았고, 나는 “피아노 칠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봤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가입을 했고, 이 후 군대 가기 전까지 기장과 회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모임 뿐 아니라 학생회나 스터디 등 기회가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참여하려고 했던 것 같다. 1학년 중 유일하게 솔로로 키보드 반주와 노래를 공연했었다.
(20세)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방학기간 중 알바를 찾지 못하다가, 2학기가 시작할 즈음 알바 자리를 구했다. 학교 바로 아래 고기집 이었는데, 이 때 사장님과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여 과 내 행사에 필요한 지원도 많이 받고, 군대 가기 전까지 자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가게를 대신 봐주기도 했다. 가끔 새벽에 불러주셔서 고기에 술 한잔 하기도 했었던 거 같다.
(20세) 2004년 10월, 학교 수업 후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새벽 2시즈음. 잠을 자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들 수 없었다. 새벽 6시쯤까지 잠을 전혀 못들다가, 마침 집안일로 와계셨던 할머니가 컴퓨터로 게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2시간 정도 후에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 후부터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면 수면장애 동반 되기 시작했다.
(20세) 2004년 11월, 살던 아파트가 재건축을 하게 되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 장소에서 20년 정도 살았는데, 유난히 기억이 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나 가족들 모두 힘든 시기였고, 이 때부터 가족 한명과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21세) 2학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학교를 1년 휴학했다. 군대 가기 전 까지는 이것저것 알바를 하고 1학년때의 활약(?)으로 소모임이나 학교 행사를 참여하게 되었었다. 사전에 입대 신청을 하지 못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을 병무청에 문의하여, 신청 후 3달만에 2005년 12월에 논산으로 입대 할 수 있었다.
(22세) 신병때 주특기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론 시험에서 99.5로 중대 최고 점수를 받았었다. 이 때 틀렸던 것은 특정 포탄의 특성과 관련된 설명에서 0을 하나 빼먹은 부분. 이 후 6개월 사이에 포병 > 계산병 > 행정병으로 보직변화를 경험했다. 도서관 관리병은 덤.
(22세) 일병 시절, “아버지 교통사고 났어~” 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에 내가 제일 처음 반문했던 것은 “자동차는 괜찮아?” 였고, 통화 종료 후 “다치신 데는 없어요?” 라고 물어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미워했던 기억이 있다.
(23세) 이라크 파병을 가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못한 부분을 배려해준 행정보급관님 덕분이었는데, 뒤돌아보면 파병기간이 군 복무기간 중 가장 힘들었었다. 당시 가족과의 연락은 국방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의 게시판을 통해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와 내가 주고받았던 편지의 양이 A4용지로 500페이지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병 기간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부대 내 피아노 연주 가능자를 찾고있다고 하여 지원해서 실제 현지인들과 함께 난타 합주공연을 하게 된 부분.
(23세) 2007년 12월, 전역을 했다. 전역한 다음 날부터 2월까지 주말에도 쉼 없이 바짝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돈을 모았다. 복학 1달 전부터는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전공 공부를 시작했다.
(24세) 2학년 1학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장학생 선정 자격 미달로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2학년 2학기 등록금 준비 과정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전공 교수님들께서 알고 힘써주셔서 3학년 때 외부 장학생 선정이 되어 졸업까지 부담을 약간 덜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24세)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동기 한명과 함께 4박5일 여행을 다녀왔다. 목포, 보성, 여수, 거제, 마지막으로 부산까지 국내를 한바퀴 돌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24세) 스터디를 만들었다. 개발을 잘 하고자 선배 한분과 동기 한명, 그리고 나 셋이서 시작했고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개발자로서 사회에 나가기 전 까지 많은 것을 함께 했고, 도움을 받았다. 특히 ICPC 대회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25세) 2008년 1월, 우연한 기회로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주말 오후 3시에 만나서 김밥을 먹고, 4시에 카페에서 차한잔 하는 도중 그분이 갑자기 친구가 애인과 다퉜다며 일찍 가봐야 한다더라. 이 후 한번 더 만났을 때 많은 얘기를 했었고, 그렇게 서로 알아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신 분이었고, 나는 학생이면서 알바를 계속 해야되는 상황이라 자주 만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분과 결혼하게 되었다 :)
(25세) 3학년 개강 시기에 맞춰 국비근로장학생에 선정되었다. 덕분에 학교를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는 교내에 있는 기업에서 업무지원과 학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어 3학년 한 해는 심적으로 큰 부담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2학기때는 참여하고 있던 스터디 주도로 학부생 전체 대상으로 세미나를 진행할 수도 있었다.
(25세) 3학년 2학기때 웹 서비스 개발 과목 프로젝트가 학부생 시절 과제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OpenAPI들을 조합하여 매시업 서비스를 웹서비스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과제 수행을 위해 동기 한명과 함께 했는데, 생각한 것을 잘 구현해내기 위하여 1주일 정도 쉼 없이 최선을 다해 과제를 수행했다. 발표 후 교수님이 했던 말은 “고생하셨어요! 이제 빨리 가서 주무세요!” 였다.
(26세) 3학년 겨울방학부터 4학년 1학기 동안 족발집 야간 알바를 했다. 밤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했었고, 부산지역에서 유명한 족발집 노하우를 배워 오픈한 가게였는데 당시 매니저님이 나를 좋게 평가해주셨다. 어느날 나에게 족발 삶는 법을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한번 고민해 봐줬으면 한다고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거절을 했다. 인생에 3번 기회가 온다고 하는데 이게 그게 아니었나 가끔 생각하기도 한다.
(26세)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교수님중 한 분께서 추천하여 작은 회사에 취업되었다. 이 때 했던 업무는 iOS 앱 개발이었고,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약하여 3달을 채우지 않고 관두기로 했다. 당시 사장님이 인생 사는데 있어서 현실적으로 많은 조언을 해주셨었다.
(27세) 학교 선배중 한명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가 공채 채용중이니 한번 지원해보라고 알려주셨다. 운이 좋게도 바로 합격이 됐고, 그렇게 중견기업에서 개발자로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메일 안드로이드 앱을 개발하는 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 때 함께 했던 분들께 개발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대하여 많이 배웠다.
(29세) 첫 직장에서 세 번째 팀으로 전적되고 3달 정도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소속되었던 조직의 상무님(=개발자)이었는데, 혹시 다시 돌아와 줄 생각 없냐고 말씀 해주셨다. 함께 일할때도 잘 챙겨주셨던 분이셨고, 고마움으로 가득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29세) 2013년 7월부터 조직 변경으로 다른 제품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iOS를 맡았었는데, 시장의 변화로 Android 제품 개발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분들과 빠르게 프로토타이핑 했고, 그 결과 해당 제품이 출시 되었다. 시장에서는 많은 호평을 받았고, 회사나 사람들에게 많이 인정을 받았다.
(29세) 2013년 11월, 주변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1년만이었다. 집 구하는게 제일 힘들었던 거 같고, 광명사거리역 근방에 전세를 구했다.
(30세) 2014년 추운 어느날, 임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사진을 보며 설명하던 중, “앗 저건 뭐지~?” 라면서, 쌍둥이 임을 알려주셨다. 기대와 불안, 그 이상의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되어있는 채 2015년 7월,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31세) 작은 아이가 선천적으로 아픈 병을 갖고 태어났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자마자 바로 응급차를 타고 지방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5일 후, 또 한번 응급차를 타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이동했고, 바로 다음날 하루종일 진행되는 큰 수술이 진행되었다. 이틀 후 응급수술이 밤새도록 진행되었고, 이 후에도 몇 번의 추가 수술 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병원이 회사 근처여서 매일 점심시간에는 아이를 응원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40일 정도 후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 1분 먼저 태어난 언니는 50일만에 동생을 집에서 보게 되었다. 분유를 먹이기 위해 연결했던 호스는 보름 후 제거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1년정도는 아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31세) 2015년 11월, 함께 일했던 팀장님의 제안으로 이직을 했다. 유통 프로세스 전반에 필요한 IT 구축을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직 후 한달만에 급여의 70%만 지급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했고, 다음 해에는 최저 급여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를 믿어주고 일을 함께 했던 팀장님이었으나, 현실적인 상황으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32세) 2016년 여름, 헤드헌팅을 통해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처우 협의사항이 잘 이행되지 않는 등 몇 가지 이슈로 빠르게 회사를 관두게 되었다.
(33세) 2017년 초, 개발 환경이나 처우 조건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논의한 끝에 입사를 결정했다. 집에서 가까운 것이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였다. 입사 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맞벌이를 하던 아내는 육아휴직을 하게 되어 경제적으로 더 불안해졌고, 나는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고 느껴 위기감이 더해졌다.
(33세) 2017년 말, 가족들과 상의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봤고,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는 안드로이드 개발자의 업무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하나하나 찾아서 시작했고, 업무 환경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34세) 2018년 3월, 서비스 현지화를 위하여 홍콩, 싱가포르 출장을 다녀왔다.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해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35세) 2018년 4월, 급격하게 건강상태가 나빠졌다. 질병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 일단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눈앞에 닥친(?) 급한 일들을 참아가며 계속 해나가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개발자 행사에서 기술 관련된 내용을 공유했고, 발표가 끝나고 곧바로 가족 여행이 있어 제주도로 이동했다. 가족 여행 후 돌아와서 한동안 쉬어야 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집중해야 할 것에 대하여 좀 더 날카롭게 다듬어보기로 했다.
(36세) 2019년 2월,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든 앱을 구글 플레이스토어에 올렸다. 로또와 관련된 앱.
(36세) 2019년 2월, 데일리 만년주니어 이벤트에서 어떤 직군의 개발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개발자로서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36세) 2019년 4월, 대학 동기에게 요청받아 모교에서 개발자의 삶에 대한 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다.
(36세) 2019년 5월, 동탄으로 이사를 왔다. 살기에 더 없이 좋고, 하루하루 변하는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족들과 터를 잡고 지역사회에 잘 스며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6세) 2019년 10월, 운동을 시작했다. 조기축구회에 가입을 신청했고, 운동 시작 초기에 매일매일 운동하려고 노력했다. 어릴때부터 항상 건강했던 나였기에, 다시 어릴 때 만큼 건강해질 수 있도록 즐거운 운동이 어떤 것인지 고민했다.